Saturday, November 4, 2017

분열 멈추고 5.18팩트 확산으로 빨갱이 매몰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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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7-11-04 14:55 조회7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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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열 멈추고 5.18팩트 확산으로 빨갱이 매몰시키자
 
                                  지금의 우익분열은 망국수준.
지금 이 나라는 아비규환이다. 문재인은 연일 대한민국을 파괴하기 위해 그리고 우익을 죽이기 위해 수많은 굿판을 벌이고 있다. 문고리 3인방이 뉴스의 초점으로 부각하면서 박근혜 확인사살 국면이 새롭게 전개되고 있다. 빨갱이 잡으라고 대통령을 만들어 주었는데 박근혜는 빨갱이들에 아부하다 결국은 우익 죽이는 낚시밥으로 이용되면서 처참하게 추락하고 있다. 박근혜를 낚시밥으로  문재인이 대통령 되었고, 박근혜를 낚사밥으로 내년 선거에서 득표하여 지방정부를 독립시키고 국가를 분열시키고 소멸시키려 하고 있다. 이는 북한의 대남공작부 통전부 사람들 정도나 세울 수 있는 고도의 정밀한 전략이다.
                                 박근혜 두 번째 우려먹는 빨갱이 잔치
박근혜 비자금 수사가 계속되면 국민여론은 문재인 편으로 쏠릴 것이고, 그래서 문재인 쪽은 박근혜를 두 번째 우려먹으면서 내년선거의 완승을 획책할 것이다. 이런 문재인 전략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바로 박근혜 지지자들이다. "박근혜 살리고 홍준표를 죽이자" 홍준표에 대한 악담들이 도를 지나치다. 이런 식의 악담은 그들 스스로의 무덤을 팔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박근혜의 무덤을 더 깊게 팔 것이다. 박근혜를 살리자 한다고 그가 살아지는가? 그런 소리 커지면 박근혜는 더욱 빨리 죽는다. 박근혜는 살릴 가치가 있는가? 박근혜는 김대중에 걸려들고 김정일에 걸려들면서부터 대한민국을 잡아 먹는 빨갱이들에게 떡밥 노릇만 했다. 살릴 수도 없지만 살릴 가치도 없는 기분 나쁜 존재다,
                                사이비종교집단 박근혜 강시족
박근혜 강시족, 박근혜에게 죄가 없다고 말들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국가운명에 별 관심 없이 생을 누리다 갑자기 태극기를 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 불침번을 한 번도 서 본적이 없었다국가경영, 국가안보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박근혜가 무슨 큰 저지레를 쳤는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5천만의 불침번을 자청했다.
           누가 박근혜를 우익이라 하는가? 그를 우익이라 하면 우익 모두가 국민 눈밖에 나
부모를 살해한 원수 김정일을 찾아가 34일 동안 호강을 하고 돌아오면서 한국과 미국 등 외국에 다니면서 김정일은 시원시원하고 대화가 잘 통하고 약속을 잘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이니 북한을 몰아치지 말고 미니마셜플랜을 제공하자, 미국 조야에 다니면서 호소했다. 감히 6.25전쟁에서 미국을 이겼다는 전승절에 중국의 사열대 망루에 올라가 시진핑 여동생 노릇도 했다. 국보법을 수정하자 했고, 6.15공동선언을 실천하자며 실천연대 행사에 부지런히 다녔다. 빨갱이들은 물론 김대중 졸개들과 전라도 것들을 요직에 앉혔다이를 염려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7인위원회 어른들이 만나자 해도 냉 차게 거절해 그들뿐만 아니라 박정희를 생각해 품 팔고 돈 써가면서 그를 대통령으로 올려주었던 거의 모든 어른들로 하여금 싸가지 없는 딸이라며 등을 돌리게 했다.
                                     빨갱이 앞잡이 노릇한 박근혜
문고리 3인방으로 하여금 장관들 위에 군림하게 하고, 통일대박을 외치면서 푼수 노릇했다. 통일은 탈북자들이 앞장서야 한다며 위장 탈북자들을 개별적으로 청와대에 불러 사진들을 찍고, 국정원 직속 연구소 높은 직책에 줄줄이 등용하면서 위장탈북 의혹을 세탁시켜주었다. 5.18은 북한이 저지른 국가전복 폭동이었다는 여론을 두 개의 방송국들이 매우 열심히 형성하고 있을 때 돌연히 여기에 수천 톤의 물을 퍼부어 불씨 자체를 제거해 버렸다. 만일 그런 푼수 짓을 하지 않았다면 박근혜는 지금 빨갱이를 청소했다는 업적으로 5천년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개념이 없는 여자라 감히 국부인 박정희를 김대중 앞에 무릎 꿇렸다. “아버지가 지은 죄에 대해 딸이 용서를 빌겠다인륜적으로 사상적으로 패륜녀였다.
                                      국가를 망친 무개념 인생
오늘의 이 수모는 자업자득이다. 이번에 또 나온 보도에 의하면 박근혜는 국정원 예산을 매달 1억원씩 가져다 용돈으로 썼다고 한다. 차지철에 버금갈 정도로 권력의 횡포를 부렸던 문고리 3인방이 국정원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모두 처벌을 받는 모양이다. 이 모든 수모는 박근혜가 자청했다. 20161026, 박근혜가 첫 사과를 했을 때 박근혜의 인물됨을 잘 살펴온 나는 앞으로 그녀에게 몰아닥칠 수모를 예측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 죽이고 대한민국을 박살내기 전에 스스로 자결하라고까지 말했다. 노무현은 박연차 게이트를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했다. 솔직히 나는 그가 타살되었다고 생각한다. 빨갱이들이 살기 위해 노무현을 죽인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이 하늘의 인물이 되었고, 100여명의 혐의자들이 모두 살아났다. 그리고 노무현의 아바타 문재인이 등장한 것이다.
                       자기 혼자 살자고 국가와 수많은 부하 기업인들에 못할 짓 저질러
그런데 박근혜는 무언가? 자기 혼자 살자고 국가를 거덜 내고, 우익을 분열시키고 수많은 부하들을 감옥에 보내고 삼성 등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마지막으로 스스로 탈당하지 않고 홍준표로 하여금 출당의 총대를 메게 함으로써 한국당을 분열시키고 우익진영을 사분오열 시키고 있지 아니한가? 나는 20161026일 글을 올렸다. 박근혜는 인간 됨됨이가 끝까지 임금님 얼굴에 생채기를 남기고 간 장희빈과 같아서 이 나리에 엄청난 재앙을 남길 것이라 예측했다. 그런데 무섭게도 그 예측은 적중했다. 이런 예측은 나 혼자만 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박근혜 종교에 빠진 강시들의 생각
박근혜를 살려내자 열심인 사람들은 그 대부분이 박근혜가 박정희 딸이라는 것, 박근혜는 여리게 생긴 공주라 국민이 잘 보호해야 한다는 것, 너무 착하고 순진해서 빨갱이들에 당했을 뿐이란 것, 그래도 통진당 해산한 거는 잘하지 않았느냐는 것, 박근혜는 너무 순진해서 문재인 에 당했기 때문에 불쌍하다는 것, 문재인이 나쁜 놈이지 박근혜가 왜 나쁘냐는 것, 유엔에 호소해서 박근혜를 살려야 한다는 것, 박근혜가 살아야 우익이 산다는 것, 이런 피상적인 상식과 무가치한 말들 말고는 아는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나처럼 국가경영과 국가안보의 전문적인 시각을 가지고 그녀를 늘 감시했더라면 그들 역시 박근혜에 정나미가 떨어졌을 것이다.
이석기는 곧 사면복권 된다는데 박근혜는 자기를 대통령 만들다 선거법에 걸린 사람들도 복권 안 시켜
20131223, 나는 그녀를 관찰한 결과를 가지고 박근혜는 통치능력 없다. 단지 남이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을 줄만 아는 수첩공주에 불과하다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이는 감정의 평가가 아니라 냉철한 관찰의 결과였다, 나는 박근혜가 대통령 되라고, 새누리당이 다수당 되라고 정확히 성금 2억원을 내서 36개 신문 광고를 냈다. 그 중 2개가 선거법에 걸려 두 개의 소송에 시달렸고 결국 2개 사건에 100만원씩의 선고를 받고 공민권이 박탈당해 있다. 피선거권은 물론 선거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빨갱이 대통령들은 감옥에 있는 간첩들까지 석방해 북으로 보내주고 범죄기록을 깨끗하게 지워주는 사면-복권을 시켜주었는데 박근혜는 오히려 나를 감옥에 넣으려고 서울중앙지검 조광환 검사를 시켜 1년 전에 무혐의 받았던 사건을 다시 조사하게 했다.
                         신성한 통치권력을 최태민 딸 심부름용도로 써
박근혜가 당선되자 나는 9개의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해주었다, 더러는 내가 박근혜를 공격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갈 길을 말해주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것을 알고 비판했을 때 많은 태극기들은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단지 애국 일념으로 그녀를 도왔고 그녀가 잘못 가고 있을 때 비판과 아울러 대안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는 그 엄청난 대통령 권력을 손에 쥐어줬는데도 말 많은 최태민의 딸과 더럽게 놀아났다. 최순실이 시키는 대로 이름 없는 소형 업체 제품을 납품받게 해 달라 재벌회장에 말했다. 최순실이 시키는 대로 독일 프랑크프르트 지사장을 연임하게 해달라고 재벌회장에 말했다. 이게 무슨 대통령인가? 삼성과 결탁했다 안 했다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기업에서 돈을 챙겼다 아니다 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가 한 이 한심한 행위들이 대통령에 어울리는 행동인가,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푼수짓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태극기를 들지 말아야 한다. 태극기에 대한 모독이다.
                      박근혜는 좌익을 번성케 하는 최고의 요리 접시
문재인이 빨갱이다?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문재인은 빨갱이이고 나라를 파괴하려 태어난 인간이 맞다. 나라를 망친 사람은 박근혜이고, 문재인은 지금부터 망치려 하고 있다. 빨갱이들의 존재도 모르면서 그들과 놀아난 죄가 바로 박근혜의 죄다. 이런 사람을 살려내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국가를 구해내자 집착하는 사람들은 비정상이다. 이런 식의 박근혜 병에 걸린 강시들이 활동을 활발히 하면 할수록 국가는 무너져 내린다. 박근혜 강시들은 홍준표를 증오한다. 내년 선거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장군을 찾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홍준표를 증오한다. 박근혜의 출당을 주도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나를 증오하는 박근혜 강시들도 매우 많다. 하지만 나는 욕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년 선거가 두려운 것이다. 박근혜는 좌익을 번성케 하는 최고의 요리 메뉴다.
                                       내년 선거의 의미
나는 약속한다. 홍준표가 5.18에 대한 진실을 외면하면 나도 홍준표에 등을 돌릴 것이다, 우리 최상의 관심은 내년 선거를 이기는 것이다. 내년 선거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적화 메커니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년선거는 지방분권화로 가는 길이고 인민공화국으로 가는 첩경이다. 연구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각기 애국자연하면서 국가를 망치는 길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
애국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루 빨리 박근혜를 멀리해야한다. 마음 속 주제를 박근혜에서 내년 선거로 바꾸어야 한다. 박근혜를 끌어안고 우익을 외치면 우익 모두가 망한다. 박근혜를 내걸고 집회를 하면 내년 선거 다 망한다. 박근혜를 정말로 위한다면 그를 연호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 구속을 연장한 이유 증 큰 하나는 석방하면 사회가 요란해진다고 판단해서일 것이다.
                   한국당이 소생하고 내년선거 이기려면 5.18에 다 걸어야
방어는 방어에 그친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고 살 길이다. 빨갱이들은 지금 박근혜를 자근자근 죽여가면서 내년 선거를 이기려 한다. 박근혜를 살리고 싶다면 빨갱이를 때려잡아야 한다. 빨갱이를 때려잡을 수 있능 유일한 무기는 아직까지 5.18진실이다. 지금 이 막막한 시점에서 5.18 팩트라는 무기기 준비돼 있지 않았다면 어디에 희망을 걸겠는가? 이글을 읽고도 나를 향해 욕을 하는 인생들 얼마나 될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런 인생들이 설치면 설칠수록 미래는 소멸된다.
 
2017.11.2. 지만원 

Friday, August 4, 2017

Sunday, June 4, 2017

Profile on May 18th 1980 Gwangju Riot (English &국문)5.18광주 사변은 민주화가 않이라 북한군과 김대중이 합세한 국가전복 을 위한 폭동이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YteVWMrS0vs 

여러분이 보시면 좋겠습니다.


Thursday, October 20, 2016

5.18광주 사변은 민주화가 않이라 북한군과 김대중이 합세한 국가전복 을 위한     폭동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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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on May 18th 1980 Gwangju Riot (English &국문)
국문으로 된 글은 영문을 올리시면 나옵니다.

A high treason event of the century, the May18th Gwangju Riot
JM WON 19. 7. 2016.  http://www.systemclub.co.kr/
The May 18th Gwangju Riot was a rebellion and NK's obvious invasion of South Korea by the Communist dictator, Kim, Il-sung that was perpetrated hand in hand with the powerful Jeolla province leader, Kim, Dae-jung in South Korea. Nevertheless, the South Korean government has annually commemorated the May 18th Gwangju Riot as if it were a democratic movement triggered by the young students, educated youngsters by textbook, even treating more than 5,000 insurgents as the most loyal citizens and patriots with larger pensions, lump sum payments and side benefits than are paid to those who    
have risked their lives in the honorable military service.
And yet, contrary to the aforementioned prestigious treatment, they have taught and influenced the children under the pretext of democratization education, to cause enmity toward their own country. This is a phenomenon that no one can understand.
Even though I established a patriotic organization, the Civic Five-million Army Command (CFA) and have finally unveiled the most bizarre case of fraud in 36 years, our government has not made a single gesture of praise for my 13-year-long research and analyss, and has completely ignored my ever remarkable accomplishments.
A world-class ruse no longer concealable
So, I can not but call the following events miracles in our history:
1. North Korean dictator, Kim, Il-sung dispatched 1,200 special commandos and non-military agents who slaughtered many of the innocent Gwangju citizens and slyly blamed their barbaric behaviors on the ROK's martial law troops.
2. Despite the fact that Kim Dae-jung had devoted himself to the NK regime as an agent and perpetrated the rebellion in league with the enemy, he was still awarded the Nobel Peace Prize.
3. A fact that a tiny civic organization has finally unveiled the historical fraud case along with unavoidable scientific proof despite endless hindrances and unjust oppressions given for last 13 years.
The truth of the May 18th Gwangju Riot conducted with several forms of deception is one of the world's telltale events. This phenomenon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and the media have so far ignored the truth is a mystery of the mysteries.
The May 18th Gwangju Riot that has been publicized to the world as a democratization movement, is now finally proved some 36 years later as the result of my 13-year research and analysis as a bizarre case of fraud, led by the 600 NK special commandos plus 600 non-military elite experts. The real commanding general who directly commanded the NK commandos in the southeastern city of Gwangju was a three-star general of the NK's People's Army, Ri Ul-sol who disguised himself as an aged country woman.
The general masqueraded as a woman actually commanded South-North coalition group of rebels and he was sitting as the General of the NK People's Army at his age of 95 like a legendary incarnation, but he died in November, 2015.
At that time, the then NK commander in chief of the espionage operation in the South, Kim Jung-rin directly commanded not only the 1,200 NK commandos plus non-military elite experts but also the local spies in place and the Kim Dae-jung followers in Jeolla Province.
Several months before the May 18th Gwanju Riot took place, many of the accommodation facilities such as hotels, temples, inns and private lodgings at the surrounding locations in Gwangju city seemed to have been offered to the group of NK commandos and the agents in place. Camouflaged as the local people and the local spies, the North Korean special commandos were easily able to carry out reconnaissance activities and acquire the key terrain features of the Gwangju city plus peripheral areas of the Jeolla province. For this reason, I am certain that many of the Jeolla province people must have known of the situational fact.
From the beginning of April, 1980, Kim Dae-jung had already started masterminding university students' demonstrations throughout the country and completed a list of the 24 cabinet members to be immediately positioned in case the administration's fall was imminent. That was why he had held meetings with related figures more than four times at the Pukak Park Hotel in Seoul. On May 16, Kim Dae-jung sent an ultimatum to the government notifying it that "all cabinet members should resign and the martial law must be lifted by May 19th. Otherwise, he threatened" I will push ahead nationwide demonstration. "
What in the world, what had made an individual politician present such a daring challenge towards an incumbent government?
It could happen because Kim Dae-jung must have already known of the rebellion plot. Kim Dae-jung was sentenced to death on the charge of treason and for forming an anti-government organization, by the Supreme Court on April 1, 1981. The Riot that continued for ten days was divided into two parts, the first four days of the violent clash and the later part of the four days set for the situation control.
An expeditious operation led by the NK special commandos was going on in the first part, and later the clueless social misfits in their teens who gathered in the hall of the provincial government wasted most of the time by arguing pros and cons for four days. For those remaining two days, the NK expeditious operation team was taking photos for the purpose of propaganda and slandering South Korea.
In the afternoon on May 21, the large force of North Korean commandos forced the ROK airborne troops to withdraw to the outskirts of Gwangju city. It was a narrow escape for the ROK airborne troops. In the absence of the ROK's riot troops, the NK commandos started wearing masks to conceal their identity, and arrested and killed those who were believed to detect their movements.
In particular, disguised as a philosopher, the late Hwang Jang-yup, the highest ranking NK defector to South Korea, was confirmed as the man in charge during the turmoil. It was found later that Hwang Jang-yup had been in charge of the propaganda and agitation towards South Korea and that he had acted much like the infamous Nazi war-criminal, Roudolf Hess.
The leading community leaders of the Gwangju city gathered at the provincial hall and discussed measures to control the confused situation. They focused on turning back the seized weapons. As to the returning of the illegal weapons, the aged leaders agreed. However, manual workers in their twenties showed strong objection to it as they were influenced by the NK agents for six days from May 22, 1980. In this manner, whenever they gathered, the Gwangju people had just wasted the time with the clash of opinions . It is therefore a proof that the Gwangju people having such a fixed habit of disagreement, had no fundamental ability to conduct a special operation by themselves in the beginning as the NK commandos had conducted.
The special operation the NK commandos had conducted for four days in the beginning:
With apparent access to the ROK Army's top secret information that the ROKA 20th Infantry Division's command vehicles would pass the Gwangju city tollgate on May 21st, 1980, at 08:00 AM, the NK commandos ambushed the ROKA 20th Division unit and seized 14 command vehicles including the commander's jeep. With the seized military vehicles they stormed one of the prestigious defense industry contractors in South Korea, the Asia Motors. With that as their disguise, they were able to capture 4 armored vehicles and 374 military trucks. From there they launched an attack on 44 armories scattered throughout the cities and towns within the vast Jeolla-namdo province. In just four hours, they seized 5,408 weapons and a good deal of dynamite.
After assembling 2,100 dynamite explosive devices, they threatened the riot troops that they would blow up entire Gwangju city. To free inmates they assaulted the Gwangju prison six times where approximately 2,700 prisoners were in confinement.
In the morning of May 26, the thoughtless teenagers ousted the moderates and declared that they would fight to the end. That finally brought about the martial law troops' crackdown operation. The felons who had been sentenced to death and imprisonment for lie later were mostly just teenagers and young riot followers in their twenties.
Although many of the NK commandos were arrested by the martial law troops, they were immediately released due to the influence of the espionage in place. As is often the case with the secret infiltrators, the NK commandos left no traces behind. That's why their activities had not been discovered for last 35 years.
Consequently, only the young manual workers were punished by the court-martial and the Supreme Court as the main culprit. These clueless workers had resisted at the provincial hall located in the center of the city for just one day on May 26, 1980. The ROK's intelligence agency was a numerically superior agency, nonetheless it could not catch even a single NK commando out of the estimated number of 1,200. They only arrested social misfits in their teens and early twenties and sentenced them to death and lifetime imprisonment. The prosecutors, judges and information analyzers involved at that time are assumed to lack the ability to function in their respective roles.
Between 1980 and 1990, the word of 'democratization' was monopolized by the younger generation of social discontents in South Korea who collaborated and sympathized in league with secret channel of the North. Therefore, the young group was able to keep deceiving the people who had in fact longed for a true democracy, and the social discontent strength could continue to dominate the public opinion.
On the pretext of dominating the public opinion, they wanted to judge Chun Doo-hwan. To do so they needed to judge the fact above all that, they believed, Chun Doo-hwan had practically led the suppression operation during the May 18th Gwangju Riot.
Ignoring the internationally accepted principle of the prohibition against double jeopardy, in 1997 the Supreme Court of South Korea completely overturned the judgment ruled in 1981, whereby the Gwangju Riot was judged a rebellion masterminded by Kim Dae-jung. The court in 1997 ruled the disguised NK commandos and their followers, the Gwangju tiger moths as the constitutional institution while they ruled that the martial law troops (airborne troops) were the rioters.
Thereafter, the ROK's contemporary history was recorded as it had been adversely judged by the court. As a result, the young students have been educated with the incorrectly written history. At the same time, the youngsters have been required to develop hostility towards their own country. This is an extraordinary phenomenon that we can experience only under a situation that is seemingly influenced by North Korea.
As it was most highly honored as a democratization movement in South Korea, the May 18th Gwangju Riot has come to reign over the nation just like an impregnable fortress. Accordingly, those whoever had defied the May18th Gwangju democratic movement (by their terms), were subject to imprisonment. In addition, tiger moths guarding the fortress committed violence to such innocent patriots, even by threatening their livelihood.
As peaceful as the expression of democratization is, frankly speaking, they ruled with fear and terror such as being committed in the Yoduk (NK) concentration camp. At the least, as far as the May 18th is concerned, the entire territory of South Korea was no better than the notorious concentration camp at Yoduk, North Korea. The May 18th event has been not only a sanctuary in terms of South Korea's democratization but also it has reigned over the country, justice, and logical arguments. The May 18 as the sanctuary of the democratization in Korea was itself a tyrant.
Thankfully, in July 2015, 19 years after the Supreme Court's judgment of 1997, our tiny civic organization 'The Five Million Civic Forces Army (CFA) for Cleaning the ROK' was luckily able to open the mysterious Pandora box that had been tightly guarded for long period of time. As soon as it had been opened, we were able to immediately learn the truth that the May 18th Gwangju Riot had been the very sanctuary fortified by the communists in both South Korea and North Korea.
Quite a while ago, I majored in analytics at the US Navy Post Graduate School in the United States. Upon arranging all the May 18th related investigation records, court judgments, NK's publications and government figures with 180,000 pages in total for last 13 years, as a mathematician and an analyst, I was finally able to publish 8 books with 3,500 pages. My 8th book contains a clear-cut conclusion proved in a method of QED (quod erat demonstrandum), the symbol of the mathematical proof.
This is my conclusion, that the so-called "May 18th Democratization Movement" was an unequivocal bizarre case of fraud perpetrated by Kim Dae-jung in South Korea in league with the North Korean dictator, Kim Il-sung. It was a rebellion led by the 600 trained-to-kill NK special commandos and 600 non-military NK agents that had secretly infiltrated into Gwangju area one after the other right after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Park Jung-hee occurred in October, 1979.
Experts in NK information and a team that consists of photographic, imagery intelligence and interpretation analysts have joined the analysis project for fourteen months beginning on May 5, 2015.
Comparing the photos of the NK commandos taken in 1980 during the May 18th rebellion with the photos of NK Kim Jong-un's power elites, we have proved that more than 477 faces in Pyeongyang are identical to the faces photographed in Gwangju. Disclosing the analysis procedure in detail, the analysts have decided to widely publicize this pictorial. The experts welcome further proofs that might be submitted by international professional analysts as well.
The earth-shattering analysis report is being spread widely enough to overwhelm the internet space. In addition, many patriots are holding one-man protests at the important spots throughout the country. An internet press company, the 'News Town' has already issued 300,000 extras of a four-page special edition of # 1, # 2 and # 3 Patriots in every corner of the nation are doing their utmost to spread the eye-opening news.
On July 7, 2015, I respectfully informed the President, Prime Minister, the National Information Service chief, Minister of Defense, presidential aides, the Chief Justice of the Supreme Court, the Prosecutor General, The Speaker of the National Assembly and the members of the National Assembly as a form of a declaration of high treason. 16 months have elapsed since the declaration was submitted. Nevertheless, we have not yet received any responses from the recipients. Surprisingly, the major media organizations in Korea seem to be very reluctant to handle such remarkable news material.
This is a bizarre phenomenon people can hardly find in a normal state, which is somewhat believed to be worse than the German corruption case described by the philosopher, Johann G Fichte in 1807.
To correct the distorted history of the May 18th Gwangju Riot means firstly that the NK regime that attacked South Korea and murdered innocent people without a declaration of a war shall have to be brought to the international justice through the United Nations. Secondly is that the local rioters who defied the government in collusion with the enemy should be charged with high treason.
Many Koreans are seriously worrying that President Park Geun-hye might not be powerful enough to deal with such an enormous national issue. Moreover, the people are deeply concerned that President Park will be unlikely able to convict Kim Dae-jung who has been clearly confirmed as the leader of the treasonous acts.
Even though she deserved it, President Park Geun-hye had received an extraordinarily warm welcome during the three nights and four days staying in North Korea when she met Kim Jung-il in her individual capacity back in 2002. And she seemed to have firmly promised to Kim Jung-il to support the issue on federation unification, likely a unification under communism. Since returning from Pyeongyang she began admiring especially Kim Dae-jung. In addition, she fully nodded through the fact that her biological father, the late president Park Jung-hee, had politically clamped down on Kim Dae-jung.
This means she had chosen the communist ideology by disregarding the love of her family. It is a leading opinion of the Korean populace that the so called "Hitting the unification bonanza" that the present Park Geun-hye administration is extensively publicizing with no detailed explanation creates many doubts as it would be a sign of a unification under communism
Our country's fate and even President Park Geun-hye herself depend upon the choice, whether the Park Geun-hye administration would side with the high treason group or vice versa. What if Park's administration decides to stand on the traitors' side? If she does, it will surely be a significant red signal to the ROK's destiny.
For this reason, we the Five Million CFA have finally arrived at a conclusion to inform our allies and the United Nations including the United States of the importance in order to save our 50 million freedom-loving people
You can see pictures of the mob came to Guangzhou.
  Catalogue 5-18-1980

JM WON 19. 7. 2016.  http://www.systemclub.co.kr/





Seoul mineral water (mineral water defection) list
                                          ( spies Bogus refugees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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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8.17. Jee Man-won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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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폭동의 프로필
 
세기의 여적사건, 1980년 5.18 광주폭동
그것은 김일성과 김대중이 손잡고 남한을 침공한 내란이었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국가는 이를 세계에 빛나는 민주화운동이라며 적과 손을 잡고
해마다 기념하고, 교과서를 통해 교육하고,
국가에 항적한 반란자들에게 개국공신에 해당하는 연금과 일시금과 옛날 귀족이나 누릴 수 있었던 특혜들을 부여하고 있다.
  
이들은 매년 수만의 젊은이들에 민주화교육을 한다면서 국가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왔다.
나는 이런 나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한국의 한 애국단체를 결성하여 36년 만에 이 사기극의 진실을 밝혀냈지만국가는 이를 반기기는커녕 철저히 외면하고 그것도 모자라
방송, 인터넷, 신문 호외지에 표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처벌하고 있다.


5.18소요사태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공론화의 공간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이 그의 적국인 남한에 1,200여명의 작전집단을 보내 광주시민을 살해 해놓고
이를 남한의 공수부대의 행위라고 뒤집어씌운 것도 기적이고,
북한정권을 위해 일생을 살아온 간첩 김대중에게 적장과 손을 잡았다며
노벨상이 주어진 것도 기적이고한 작은 애국단체가 13년 동안 국가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으며
이 사기극을 추적하여 과학으로 증명해 낸 것도 기적이다.



5.18의 진실은 여러 개의 기적들로 이루어진 세계적인 낭중지추다. 이를 외면하는 한국이라는 국가와 언론들은 세계의 불가사의다.   전 세계에 민주화운동으로 선전된 1980년 5월 광주폭동, 13년의 분석결과 북한특수군 600명과 또 다른 600여명의 행정 및 대남공작 엘리트 집단이
주도한 사기극이었음이 36년 만에 증명되었다.


남한 땅 서남쪽 광주에서 600명의 북한군을 총지휘한 사령관은 3성장군인 리을설 상장
그는 광주에서 여장으로 변장한 채 남북한 반역집단을 지휘했고,
그후 전설의 화신이 되어 95세로 인민군원수를 달고 있다가 2015년 11월 사망했다.
 
당시 북한의 대남공작 총 사령관인 김중린은 광주에서 1,200여명의 대남공작 집단만 지휘한 것이 아니라 남한에 파견된 수많은 고정간첩들과 김대중을 추종하는 전라도 주민들을 간접 지휘했다. 1980년 5월 18일, 내란사건 발발 이전 수개월 전부터 광주일원의 사찰, 호텔, 여관, 개인주택 등 수많은 숙박수단들이이미 북한집단과 간첩들에 제공되었고 이들은 광주 등 전남지역 일대의 지형과 지형지물들을 부지런히 정찰하여 숙지시켰다.
이런 사실을 수많은 광주인들과 전라인들이 알고 있었다.
 
1980년 4월 초부터 김대중은 전국 대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조종하였고, 북악파크호텔에서 4차례 비밀모임을 주도하여 국가전복이 성공했을 때 가동시킬 24명 내각명단을 작성하였다.
5월 16일에는 국가를 향해 최후통첩을 발표했다.“5월 19일까지 내각이 총사퇴하고 계엄령을 철폐하라, 이에 응하지 않으면 전국봉기를 강행할 것이다”
 
정당도 갖지 못한 한 정치꾼의 이런 당돌 무쌍한 행동은 어떤 힘에서 유래 했는가
김대중은 이때 이미 광주에 여적사건이 곧 발발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대중은 1981년 4월 1일 대법원에서 내란죄 및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10일 동안 진행됐던 광주폭동은 처음 4일 동안의 폭동과 나중 6일 동안의 사태수습기간으로 분해된다.처음 4일은 북한특수군이 주도한 전광석화와 같은 도깨비 작전이었고 그 다음 2일간은 북한 원정대에 의한 대남모략용 사진찍기 작전이었고,
나머지 4일간은 개념 없는 10대 및 20대들이 전라남도 도청 안에 모여들어 자기들끼리 갑론을박하며 싸운 기간이었다.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은 북한특수군의 작전에 밀려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부지한 채 시외곽으로 탈출했다 적을 잃은 북한군은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복면들을 하고 그들을 염탐할 수 있는 젊은 광주인들을 잡아다 살해했다. 철학자로 위장한 황장엽이 그 대장이었다
알고 보니 황장엽은 나치의 헤스 같은 존재였고, 대남선전선동을 담당했다.
 
광주의 유지들이 전남도청에 모여 수습방안을 논의했다. 수습방안이란 총기를 먼저 반납하자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총기를 반납하자 하고 20대 막노동자들은 북한 공작조의 영향을 받아
이에 저항했다. 이처럼 광주인들은 모이면 의견충돌로 날을 지샜다.
말싸움이 고질화된 이런 광주인들이 처음 4일 동안 북한군이 이룩했던 특공작전을 수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북한특수군이 처음 4일간 수행한 특공작전, 제20사단 지휘부 차량이 5월 21일 08시에 광주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알아가지고 매복해 있다가 사단장 차를 포함한 지프차 14대를 탈취해가지고 이를 군용차 생산공장으로 몰고 가 위세를 자랑했다
위세에 눌린 공장간부들은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에 열쇠를 꽂아주었다.


북한군 600명은 여기에서 차량들을 몰고 전남지역 44개소에 숨어 있는 무기고를
공격해 5,408정의 총기와 다이너마이트를 불과 4시간 만에 탈취했다 그리고 다이너마이트 2,100발을 조립해놓고 광주시를 날려버리겠다 계엄군을 협박했다.
2,700명이 수용된 광주교도소를 6회 공격했다,   5월 26일 아침이었다. 일부 개념 없는 10-20대들이 온건파를 몰아내고 끝까지 계엄군에 맞서 싸울 것을 선포했고, 이것이 계엄군의 진압작전을 초대했다.

당시 사형 및 무기 징역을 선고받은 폭동의 중범죄자들은 바로 이들 10대와 20대였다
북한특수군 여러 명이 계엄군에 잡혔지만 간첩들의 역할로 즉시 풀려났다.
북한특수군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활동사실은 그로부터 36년 동안 발견되지 못했다. 그리고 1980년 군사재판과 대법원은 5월 26일 하루 동안 광주시 중앙에 소재한 전남도청을 지배했던 10-20대 막노동꾼들만 내란 폭동의 주범들로 처벌하고 말았다
대한민국은 수적으로 엄청난 정보기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1,200여명으로 추산되는 북한의 주동자들은 단 1명도 잡지 못하고 넝마주이 10대 및 20대의 계급들만 붙잡아 사형 및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당시의 정보분석자들, 검사, 판사들이 참으로 한심한 수준의 사람들이었다.
 
1980-90년대에는 북한과 내통하는 젊은 세대들이 ‘민주화’라는 단어를 선점했다.
그리고 정말로 민주화를 갈망하던 국민들을 속여 세상 여론을 장악했다.
그들은 국민여론을 등에 업고 “독재자”(?) 전두환을 심판하기를 원했고,
전두환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그가 주도했다는 5.18폭동 진압 사실을 심판해야했다.
1997년의 한국 대법원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일사부재리원칙을 무시하고"5.18은 김대중이 배후 지휘한 폭동이었다”는 1981년의 대법원 판결을 뒤집었다. 북한에서 온 위장 특수군과 그들을 추수하여 여적죄를 저지른 광주의 부나비들을 헌법수호세력으로 판결했고,
이를 진압한 정부군을 폭도로 판결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역사는 뒤집힌 판결 그대로 기록됐고
오늘도 학생들은 교과서를 배우며 대한민국에 대한 적개심을 합법적으로 키우고 있다.



국가가 북한에 점령되지 않고서는 발생할 수 없는 기막힌 기현상이다.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신격화되어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군림했다.누구든 5.18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고 말하면 법관들은 그를 끌어다 감옥에 넣었고 5.18성역을 지키는 광주의 어깨들은 그 사람을 데려다 린치하고 생활근거를 파괴했다.   말로는 민주화라 하지만 사실은 지금 이순간의 한국은 요덕수용소처럼 무시무시한 공포가 지배한다. 5.18에 관한한, 한국 땅 전체가 요덕수용소였다.




광주의 5.18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성전이었고‘5.18’과 ‘민주화‘라는 단어만 내세우면
국가도 논리도 정의도 부정돼 왔다. 민주화의 성지 ‘5.18’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폭군 그 자체였다.   1997년 대법원 판결로부터 18년만인 2014년 10월, 작은 한 애국단체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이삼엄하게 호위되던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열어 젖혔다.열고 보니 5.18은 남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쌓아올린 사기극의 성전이었다.   미해군대학원 석사 및 박사 과정에서 분석학을 전공한 수리공학자가 13년 동안 18만 쪽에 달하는 5.18재판기록을 정리하고,
북한책과 정부보고서 등을 총정리하여 3,500 페이지의 책 8권을 냈다.




그 8번째 책의 결론에는 수학적 증명의 상징인 Q.E.D. 식 결론이 내려졌다.  
5.18광주민주화는 김일성과 김대중의 야합한 사기극이었고 살인과 모략공작을 전문으로 하는 북한군 600명과 공작단 600명이 1979년 10월 박정희 시해사건 직후부터 축차로 침투하여 일으킨 내란폭동이었다 결론지은 것이다.2015년 5월 5일부터 14개월 동안, 북한정보를 전공한 전문팀, 최신영상분석 기술을 구사하는 기술팀이 여기에 참여했다.
 
1980년 광주에서 찍힌 얼굴들과 지금 평양의 김정은 권력 핵심인물들의 얼굴을 비교분석한 결과 400여명의 평양얼굴들이 광주얼굴들과 일치함을 증명하였다.
분석팀은 영상분석과정을 낱낱이 공개하였고, 국제사회의 검증을 환영하면서 이 화보판 내용들을 능동적으로 널리 공개하고 있다.   이 결론들은 한국사회의 인터넷 공간을 압도할 만큼 널리 확산되었고, 각 지역에서 수많은 애국국민들이 1인시위를 벌이고 나섰다.
일간지 신문 사이즈 4개면 분량으로 인터넷 신문 뉴스타운이 호외지 1호, 2호, 3호를 각 10만부씩 발간했다. 전국에 분포돼있는 애국국민들이 이를 온 국민에 전파하느라
땀과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 국무총리, 국정원장, 국방장관, 청와대참모, 대법원장, 검찰총장, 국회의장, 국회의원들에 “내우외환죄 신고서” 형태로 이 증명된 사실을 범죄신고 타이틀로 신고했지만 신고된 지 16개월이 되도록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웬 일인지 한국의 그 어느 주요 언론들도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이는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다. 1807년 독일의 피히테가 묘사한
독일인들의 부패상보다 더 악화돼 있다   5.18역사를 바로 잡는다는 것은 첫째, 선전포고 없이
한국을 침략하여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킨 북한을 전쟁범죄자로 UN에 신고하여 처벌하는 것이고 둘째, 북한군을 광주로 끌어들여 이들과 함께 국가에 항적한 광주시민들을 여적죄로 처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엄청난 일을 하기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너무 약하다고 국민들은 우려한다.
더욱 우려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여적의 수괴로 판명된 김대중을 처벌할 수 없다는 우려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2년 북한 김정일을 찾아가 3박4일 동안 최고급의 대접을 받았고,
그와 손가락을 걸고 사실상의 적화통일인 연방제통일을 약속하였다. 그 후부터 박근혜는 김대중을 숭상함과 동시에 그의 친부 박정희를 김대중 학대자로 선언함으로써
혈육을 버리고 공산주의 이념을 선택하였다.

박근혜정부가 아무런 개념 설명 없이대대적으로 선동하는 통일대박은 사실상 적화통일대박이라는 것이 많은 국민들의 생각이다,   박근혜 정부여적의 편에 서느냐,
아니면 여적죄를 다스리느냐, 그 자신의 운명도 국가의 운명도 이 하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만일 박근혜 정부가 여적의 편에 선다면 이는 대한민국 운명에 빨간 SOS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하기에 우리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은 국가를 구하고 5천만 국민을 구하기 위해
미국 등 우방국들과 UN 등에 이 위급사항을 알리고 구원을 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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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수(탈북광수)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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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현장사진 한 장에 찍힌 탈북자(서울광수) 50명의 의미


2016년 8월 17일.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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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March 15, 2017

10% 가산점 받는 금수저 ‘5.18유공자’가 누리는 귀족대우

10% 가산점 받는 금수저 ‘5.18유공자’가 누리는 귀족대우
                      
 글쓴이 : 지만원

                          10% 가산점 받는 금수저

                     ‘5.18유공자’가 누리는 귀족대우  

1. 수만 명 자식들에까지 국가고시, 임용고시, 내부승진시험에 5-10% 가산점 제공
2. 국가기관, 국영기업, 금융기관, 대기업에 대한 취업우선 및 취업알선
3. 수억대의 일시 보상금, 월 수십-수백만 원의 연금

4.  본인, 배우자 및 자녀 학비 면제.  의료비 100%까지 감면  
5 은행대출, 주택청약, 공과금, 교통비 항공료 무료 및 감면
6. 아들 병역면제(6개월 공익근무)  

         국가고시 임용고시 5-10% 가산점, 공직자리 싹쓸이 
 
‘5.18유공자’, 이들의 자녀들은 국가고시, 임용고시에 5-10% 가산점을 받아 정부기관, 국가기관, 경찰, 법원, 검찰, 교원, 정부산하기관, 국영기업 등의 자리를 거의 싹쓸이하고 있으며, 금융기관 대기업 일자리까지 최우선으로 차지합니다. 노량진, 신림동 등에서 고생을 하면서 똑똑한 사람들이 5수 10수 탈락하는 이유는 바로 이들 5.18유공자 자녀들이 먼저 차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특혜는 내부승진시험에도 적용됩니다. ‘5.18유공자’ 아들은 병역도 면제되어 6개월 간 공익근무로 끝냅니다. 반면 병역 의무를 필한 사람들에 주어지던 2% 가산점은 김대중 시절에 소멸되었습니다.  
                                    금전 혜택 
‘5.18유공자는 1990년부터 당시 화폐로 1인당 평균 5,800만원을 받았습니다. 최고액수는 3억7,00만원, 최저액수 500만원이었습니다. 19세에 경찰을 닭장차에 가두었다는 공로로 2억을 보상받은 윤기권은 2001년 월북하여 대남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일시금에 추가해 매월 연금을 받습니다. 최고는 월 4,226,000원, 최저는 월 362,000원입니다. 1990년에 4억이라면 지금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얼마이겠습니까?  태극무공훈장, 그 수훈자가 사망하면 참모총장이 상주가 되는 엄청난 훈장입니다. 그런데 6.25전투에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은 수십 년 동안 월 37만원으로 깍두기 하나를 놓고 밥을 먹는다 합니다. 
                                    복지 혜택

1. 교육지원: 본인, 배우자, 자녀에 학자금 수업료 전액면제, 대학원 특수학교에 장학금 지원
2. 취업지원 : 본인, 배우자, 자녀들에 취업알선 및 가산점 취업, 직업훈련 무료
3. 의료지원 : 본인 100% 무료, 가족 및 유족 30-60% 감면.
4. 금융대부지원: 농토구입자금, 사업자금, 주택구입비 대부, 아파트 우선분양
5. 수송시설 이용료 감면: 철도, 지하철, 시내버스, 시외버스, 고속버스, 내항여객선, 국내선 항공기 30-100% 무료.
6. 기타지원: 양로지원, 보훈요양원 이용, 5.18묘지 안장 및 부대비용 , 동사무소 수수료 면제, 고궁, 공원 무료, 개인택시 우선 면허  
         해마다 늘어나는 5.18유공자, 권노갑-한화갑 등 5,679명  
5.18유공자란 무엇인가? 1980년 5.18 광주 폭동 때 계엄군을 상대로 폭동을 일으키다 사망한 사람으로부터 뺨을 맞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2014년 7월, 광주시가 공식 확인한 5.18유공자 수는 4,634명, 사망자 155, 행방불명 81, 상이 후 사망 110, 상이 3,378, 연행-구금 910명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탄핵기간에 슬며시 광주시가 권노갑 이훈평 등 폭동에 참여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을 포함해 117명을 추가하였습니다.  
2017년 2월 현재 5.18유공자는 5,769명입니다. 3년 만에 무려 1,135명이나 늘어난 것입니다. 이 숫자는 광주시민 사망한 155명, 1심에서 유좌판결 받은 사람 282명을 보탠 437명을 13배 이상 부풀린 숫자입니다. 이들 중에는 주유소 휘발유 드럼통을 4번째 훔쳐가다가 총에 맞은 사람도 있는데 1억을 받았다며 광주시민들까지 입을 삐쭉입니다.  
       유공자 명단과 공적 내용은 개인정보라 공개할 수 없다는 정부  
하지만 베트남 전투부대에서 박격포 피격으로 부상당한 제 부하가 유공자신청 소송을 걸었고, 제가 나가 증언을 했는데도 행정법원 판사의 눈초리는 싸늘했습니다. 결국 이리 저리 천대만 받다 불허되어 지금은 다리에 살이 썩어갑니다. 이처럼 국가의 부름을 받고 조국을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내놓았던 참전장병들은 전사자나 부상자나 조국으로부터 차디찬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분향소에는 김대중 눈치를 보느라 국방장관 해군총장 장군들은 물론 그 어느 군인들도 찾지 않았습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은 보상금도 받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2억원이 지급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용산에서 불법농성을 하다 사망한 사람은 1인당 7억원, 세월호 희생자들에는 1인당 8억-12억이 지급되었고, 1989년 부산동의대에서 경찰관 7명을 불에 태워죽였다는 혐의로 종신징역을 받은 폭력학생에게는 2002년 6억원이 지급되었습니다. 국가폭력배인 경찰을 죽인 것은 최고의 민주화 공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이 5.18유공자인 이유 역시 국가 폭력배인 경찰과 군을 공격한 것이 최고의 민주화 공적이라는 것입니다. 광주-전라도 사람들은 시위현장에 가지 않은 사람들까지 5.18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5.18유공자’가 받는 혜택이 하늘이라면 일반 ‘국가유공자’가 받는 혜택은 땅입니다. 이 많은 유공자들이 도대체 누구이며, 무슨 공적을 세웠기에 특별 귀족 대우를 받는 것인지 보훈처-광주시-국가기록원을 상대로 정보공개를 신청했지만 개인정보에 해당한다며 공개를 거부합니다. 이러한 혜택을 극력 보호하기 위해 박지원과 국민의당 38명이 5.18에 대해 이의 달지 말라는 “5.18조롱금지법”을 국민의당 입법추진 제1호로 제기해놓고 있습니다.  
                        55만 민주화유공자 자녀도 가산점 싹쓸이에 동참  
3-6공 시대에 간첩질-반국가 활동을 해서 감옥에 갔던 사람들이 줄줄이 재심을 받아 1인당 수억에서 수십억의 보상금을 받았고, 이렇게 나간 국민세금은 2조가 넘습니다. 가산점을 누리는 대상자는 1990년 172,000여명, 2000년 560,000여명, 2002년 663,000여명, 2003년 718,000여명으로 무자비하게 늘었습니다. 김대중이 55만 명을 늘린 것입니다. 김대중이 무더기로 늘린 가산점 혜택자 55만명이 대체로 다 민주화유공자 관련자들일 것입니다. 여기에 5.18유공자 관련자 3만을 더하면 58만, 58만명이 가산점 혜택을 받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58만 규모가 가산점을 가지고 해마다 덤비니 남는 자리기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이 많은 가산점 수혜자들을 없애지 않으면서 고시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민주화의 성지는 5.18입니다. ‘5.18유공자’를 없애버리면 민주화유공자는 설 자리가 없어 즉시 소멸됩니다. 국가를 반역한 사람들이 국민 세금을 약탈해가고 1급 일자리들을 싹쓸이 하는 것은 국민저항운동으로 반드시 폐지시켜야 할 악입니다.

                                 도대체 5.18이 무엇이기에  
5.18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발생한 무장폭동이었습니다. 광주시민 155명이 사망했고, 군인23명, 경찰 4명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대법원은 5.18을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386민주화 세력이 사회를 장악하면서 5.18은 전두환이 일으킨 내란사건인 것으로 뒤집혔습니다. 검찰 수사기록은 1980년 것이나 1995년 것이나 똑 같았지만 판사들의 해석이 정반대였습니다. 1997년 4월 17일의 대법원은 총기로 무장한 광주의 폭도들을 헌법을 지키기 위해 결집한 준-헌법기관이라는 참으로 기막힌 판결을 했고, 국가를 살인집단이라 판결했습니다. 사실과 전혀 다른 억지 판결이었습니다,  
검찰수사결과 보고서에 의하면 대학생으로 위장한 맥가이버 집단 600명은 전투서열이 매우 높은 제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가 광주 톨게이트를 5월 21일 08시에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알아가지고 몽둥이 화염병 등을 소지한 채 매복해 있다가 08시가 되자 통과하는 차량부대를 기습해 사단장 지프차를 포함해 14대의 지프차를 털어가지고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차량대열을 마주한 군납업체 사람들이 놀라서 신형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에 열쇠를 꽂아주었습니다. 이 600명은 전라남도 17개 시, 군에 꼭꼭 숨겨져 있는 44개 무기고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 12시부터 불과 4시간 만에 5,403정의 총기를 털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해 전남도청에 운반해 놓고, 뇌관과 도화선을 연결해 2,100발의 폭탄으로 조립해놓고 계엄군에 광주시를 폭발시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과연 이런 낯선 집단이 대한민국 헌법을 지키려 한 집단입니까? 이런 능력은 세계최고의 특공대나 할 수 있는 능력 즉 북한특수군의 능력입니다.
이어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015.5.5.부터 18개월 동안 선진국 정보기관에서 영상을 분석하던 전문가팀이 광주 현장사진들을 대거 발굴해 내고, 그 사진 속의 478명 얼굴이 북한 핵심 권력층 인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입니다. 광주얼굴과 북한얼굴을 비교한 영상 화보집이 국영문으로 발간돼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이나 국과수에는 이러한 능력을 아직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광주는 478명의 얼굴 사진들을 6개월 동안 광주시 전체에 전시했지만 사실상 “현장 주역의 이 얼굴이 바로 나요”하고 나타난 사람 없습니다. 이로써 5.18은 김대중의 광주가 북한군 전투조 600명, 정치모략공작조 600여명, 계 1,200여명을 불러들여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일으킨 여적폭동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입니다.
 
“5.18영상고발” 화보집 또는 미니화보 신청할 곳: 500만야전군(의장 지만원 박사)
전화 02-595-2563, 팩스 02-3472-9284, E-Mail: jmw327@gmail.com
홈페이지: 시스템클럽 또는 www.systemclub.co.kr


 

2017.3.15.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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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좀 먹는 518유공자 혜택!

518 유공자 혜택 제도는 해도해도 너무하는 제도이다.  특히  518 혜택에 대한 가산점 제도는 정도가 
심하여 국민들이 인터넷 상으로 볼수 없도록 되어있단다.
가산점에 대해 서만 알아보자.
518 유공자와 자녀들이 대학교와 , 교직임용시험, 경찰 . 사법,행정,외교 등등의 공무원 시험 , 
일반 기업 등등의 시험에서  이들을 위한 가산점이 10%란다.
그러니 웬만한 국민들은 518 혜택자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일반 국민들은 그냥 시험 들러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가산점 10%가 10%가 아님을 일반 국민들은 알아야 한다. 
예를들면 대학교 입학 수능시험에서 국어, 영어, 수학 점수가 각각  100점이라고 한다면 이들이 
받은 점수가 국어, 영어, 수학, 이 각각 50점이라고 한다면 일반 국민들이 생각하기에는 50x3은 150에서  10% 가미된 150+15는 165가 되어야 하지만, 그들의 가산법은 각 과목당 10% 더하여 거기서 또 10%를 가미하는 방법이다. 
즉 국어 50+5. 영어 50+5. 수학 50%5 합계 165 에서 또 10% 가미한 165+ 16.5는 181. 5가 되는 계산법이다.  
그러니 어지간한 일반 국민들의 자녀들은 이들과 경쟁할 수 없는 것이다. 
 저번에 광주에 있는 한 여고에서 내신성적 조작 사건이 언론에 발표되었다.  왜 그들이 내신성적을 조작했는가?  일류대학에 쉽게 가기 위해서 그런 짓을 교사,학부모가 짜고 한 것이다. 
 
 김영삼. 김대중 이후 518 폭도들의 자녀들이 대학, 공무원(경찰,법원,교직)  일반 기업에 들어가서 나라를 좌익화 하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마침 김진태 대통령 후보가 518 유공자 혜택의 부조리를 알리고 있으니 국민들은 깨어나야 한다. 
 특히나 518 유공자 선정은 보훈처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광주시장이 결정하는 거란다.  그러니 끼리끼리 해먹는다는 말이 맞는 것이다. 
 518은  김대중의 지시에 의해 김일성이가 보낸 북괴특수군과 광주의 간첩 세력들의 반란사건이다. 그들도 그들이 한 짓이 반란 사건인 것임을 알기에 일반 국민들이 알지 못하도록 518 유공자들이 누구인지, 518때 무슨 짓을 했는지 철저히 가리고 법으로 국민들이 알지 못하도록 못박으려 하고 있다.